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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에 대한 오해와 실제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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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피해자·목격자 의식 과거로 유도…주요 단서 기억 끌어내

'마술'과는 달라…신체·정신 이완해 집중도 극대화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그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피해자의 '1초 기억'이었다.

2010년 7월, 회사원 A(27·여)씨는 퇴근 후 서울 영등포구에서 직장 동료들과 회식을 하며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새벽시간대가 돼서야 택시를 타고 양천구에 있는 자취방에 도착한 그는 집에 들어가면서 깜박하고 출입문을 잠그지 않았다.

시간이 늦은 데다 술에도 꽤 취한 A씨는 피곤했다. 몸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A씨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묵직한 주먹이 그의 눈을 때렸다.

A씨는 눈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상대방은 성폭행을 시도하다 여의치 않자 A씨에게 이불을 덮어씌워 자신을 보지 못하게 했다. 이어 집안을 뒤져 귀금속 등 금품을 들고 달아났다. A씨는 상대방을 '아주 잠시' 봤지만, 기억할 틈도 없었다.

서울 양천경찰서는 괴한이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와 범행한 것으로 보고 주변 폐쇄회로(CC)TV를 확인하는 등 수사에 나섰다. A씨도 협조하고 싶었지만, 취중이었던 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범인 얼굴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봤지만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서 경찰이 떠올린 묘안은 최면수사였다. 피해자나 목격자를 최면에 들게 해 특정 기억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는 기법이다. 마침 당시 양천서 과학수사팀장이던 정형곤 경위가 최면수사 교육을 받은 경력자였다.

사전 면담으로 A씨의 긴장을 충분히 풀어준 정 경위는 본격적으로 최면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심호흡하세요. 긴장하거나 힘을 주지 마시고요. 아랫배 속에 풍선이 하나 들어 있는데, 숨을 들이마실 때 바람이 들어가 풍선이 커진다고 생각하세요." 눈을 감은 채 정 경위의 '유도문'을 듣던 A씨는 어느새 최면 상태가 됐다.

범죄 피해자는 큰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 최면 상태이더라도 당시 기억에 다가가는 일은 고통스럽다. 정 경위는 '마네킹 기법'을 이용해 A씨를 안심시켰다. "당신의 집 욕실입니다. 문이 열리고, 눈앞에 범인처럼 생긴 사람이 보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저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당신을 전혀 해칠 수 없어요. 이제 저 사람 얼굴을 한번 보세요.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요? 어떤 옷을 입었나요?"

최면 상태인 A씨의 입에서 답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건장한 체격이에요. 검은색 후드티를 입었고요. 얼굴에 수염은 없어요." 정 경위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A씨는 불과 1초 동안 스치듯 본 범인의 이목구비까지 묘사했다.

경찰은 A씨 진술을 토대로 용의자 특정에 나섰다. 마침 A씨 집 주변 CCTV에 검은색 후드티를 입은 남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장면이 잡혀 있었다. 영상에 찍힌 오토바이는 국내에 300대 정도밖에 없는 수입 차량이었다. 경찰은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구매자 명단과 사진 등을 확보했다.

경찰은 A씨를 다시 불렀다. 오토바이 구매자 300여명 중 용의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경찰이 보여준 사진을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던 A씨의 눈이 어느 순간 멈췄다. A씨는 큰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이 사람이에요." 최면 상태에서 떠올린 기억은 최면에서 깨어난 뒤에도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경찰은 A씨가 지목한 인물을 검거해 범행을 자백받고, A씨 집에서 가져간 귀금속도 압수했다. 절도 전과가 있는 30대 남성이었다.

◇ 최면은 마술 아냐…신체·정신 이완 통해 집중력 극대화

최면은 많은 오해를 받는 분야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최면을 걸면 자신의 의지대로 상대방을 '조종'할 수 있다는 등 마치 마술처럼 여기는 것이 대표적 오해다.

최면에 빠지면 신체와 정신이 고도로 이완되면서 매우 편안하고 몽롱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의식은 분명히 존재한다. 최면 상태에서도 원하지 않는 요구는 거부할 수 있다. 최면을 거부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아예 최면에 들지도 않는다.

최면이 '수면'과 같다는 오해도 있다. 최면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재촉할 최(催)에 잘 면(眠)자를 쓰므로 '잠들게 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최면 상태는 잠을 잘 때와 달리 의식이 외부 자극에 열려 있다. 이런 차이는 뇌파로도 확인된다.

사람이 깨어 있을 때는 베타파라는 빠른 파동이, 잠을 잘 때는 델타파라는 매우 느린 파동이 나타난다. 그러나 최면 상태에서는 알파파와 세타파가 주로 확인된다. 명상에 잠기는 등 긴장이 이완되고 집중된 상태에서 주로 보이는 파동이다.

한때 집중력을 높이고 숙면을 유도하는 학습용 기기가 수험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기기의 원리도 이같은 뇌파 유형의 차이를 이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최면은 마술이나 심령술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이완된, 즉 매우 편안해진 결과 특정 대상에 관한 집중력이 크게 향상된 상태를 이용하는 기법이다. 이 상태에서는 청각이나 후각, 촉각과 같은 감각이 극대화하고, 희미한 오래전 기억이 마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 심리적 장벽과 시간 뛰어넘어…범죄 기억 끌어내는 최면

최면의 이런 특성은 범죄 수사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CCTV 등 물리적 증거가 마땅치 않을 때, 피해자나 목격자를 최면 상태로 유도해 특정 기억에 대한 집중력을 높여 수사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최면수사 또는 법최면이라고 부른다.

범죄 피해자는 심리적 외상이나 정신적 충격으로 사건 당시 기억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장을 본 목격자의 기억도 시간이 많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혹은 큰 줄기만 기억할 뿐 주변 정보는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의 조각이 당장 떠오르지 않더라도 대뇌 어디엔가는 남아 있다. 이 조각을 사건과 연관시켜 끄집어내는 것이 최면수사다. 짧은 순간 스친 범인의 인상착의, 사건 당시 주변 상황, 뺑소니 차량 종류와 특징 등 최면수사로 끌어낼 수 있는 단서는 많다. 피최면자가 떠올린 이미지를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할 수도 있다.

최면수사에서는 최면자와 피최면자 간 라포(rapport) 형성이 중요하다. 라포는 '협력관계' 또는 '친밀감'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다. 피최면자가 수사관을 믿지 못하면 몸과 마음을 충분히 이완시킬 수 없어 최면에 들기 어렵고, 기억에 접근하는 데도 장벽이 생긴다. 라포는 최면수사의 처음이자 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때문에 최면수사관들은 최면 유도에 앞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피최면자와 라포를 형성한다. 날씨나 그날 상황 등에 관해 소소한 대화를 나누면서 친밀감을 만들고, 최면에 대한 오해가 있다면 이를 친절히 풀어주며 마음을 편히 갖도록 한다. 그러면서 피최면자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를 수사에 반영한다.

최면이 성공하면 피해자나 목격자의 의식은 사건 당시 순간으로 이동한다. 마치 그 순간을 눈앞에서 다시 겪는 상태가 된다. 이를 가리켜 퇴행(regression)이라고 한다. 유의할 점은 의식이 퇴행한 피해자는 당시 장면을 눈으로 볼 뿐 아니라 몸 상태와 감정까지 고스란히 가져온다는 점이다.

실제 최면수사를 받는 강력범죄 피해자들은 수사관의 유도대로 기억을 떠올리다 공포감에 호흡이 가빠지거나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사건 당시 받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기억의 문을 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수사관들은 피해자로부터 기억을 끌어내기에 앞서 미리 심리적 안전장치를 둔다. 의식이 퇴행해 사건 당시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에게 위해가 생기지 않는다는 확신을 피해자에게 주는 절차다.

양천서 사건에서 정 경위가 사용한 '마네킹 기법' 외에도 여러 방법이 있다. 피해자가 헬멧 등으로 중무장해 어떤 물리적 피해도 발생하지 않고, 눈앞의 범인은 단단한 유리상자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다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 범인이 실제 눈앞에 있지 않고 TV나 영화 화면에 보일 뿐이라는 암시로 안심시키는 방법도 있다.

충격적 기억을 떠올린 피해자에게는 최면 상태에서 깨울 때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잘했어요. 이제 앞으로는 좋은 기억만 생길 겁니다"라는 식으로 마음을 어루만진 뒤 각성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 최면 중 떠올린 기억은 각성 이후에도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렇게 최면수사를 받은 피해자들은 "마음이 편안해졌다"며 수사관에게 고마워하기도 한다.

물론 최면수사가 만능은 아니다. 수사 협조 의지가 강한 피해자나 목격자는 최면에 잘 유도되는 편이지만, 범행을 감추려는 피의자에게 최면으로 자백을 받기란 어렵다. 피최면자의 의사에 반하는 진술을 끌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피최면자의 진술은 법정 증거로 인정되지 않아 수사 단서로만 활용해야 한다.

◇ "'인적 증거' 의존하는 사건 늘 있어…법최면으로 수사 초점 잡는다"

최면의 역사는 인류 문명만큼 오래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주술가인 샤먼이 등장했을 때부터 최면이 존재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최면이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18세기 들어서였다. 범죄 수사에서는 1970년대 들어서야 법최면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1999년 정신의학계와 심리학계, 경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대한최면수사연구회를 만들면서 비로소 법최면 시대가 열렸다.

경찰은 2009년 경찰수사연수원에 교육과정을 개설해 최면수사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2016년 6월 현재 경찰청과 16개 지방경찰청에서 37명이 최면수사관으로 활동 중이다. 국과수에도 법최면 전문가 2명이 재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과학수사 기법이 너무 발전한 나머지 법최면은 다소 사양길을 걷는 추세다. CCTV, 블랙박스 등을 활용한 물리적 증거 기법이 날로 진보하면서 인간의 기억에 의지하는 몽타주나 최면수사의 필요성은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범죄는 날로 지능화하고, 현장에서 물리적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운 사건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인적 증거'를 수집하는 최면수사 기법은 앞으로도 계속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양천서 사건에서 최면수사 없이 그저 수많은 CCTV를 분석해 용의자를 추적했더라도 결국 사건은 해결됐을 것이다. 그러나 최면수사로 피해자의 기억을 끌어내 용의자를 일찍 지목한 덕분에 범인 검거까지 시간이 단축됐다.

앞으로는 최면수사를 받는 피해자나 목격자의 기억이 정확한지 확인하고자 뇌파를 활용하는 기법도 개발될 전망이다. 최면수사 중 대뇌에서 보이는 뇌파 형태 등을 분석, 해당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이 정확한지 검증하는 방식이다.

국과수 관계자는 "사람의 기억과 같은 인적 증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건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라며 "법최면으로 피해자나 목격자로부터 정확한 진술을 확보하면 수사의 초점을 쉽게 찾을 수 있어 효율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puls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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